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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시x”
약수 사거리, 사거리에서 카메라를 들고 서 있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행위이다. 약수 고가가 없어지고 몇 년, 다른 세상에서 호의호식하겠다고 내려온 이 불청객 무리는 약수 일대에 기어코 불가항력적인 계급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지금이 되기까지 나는 언제나 길을 거닐 때 땅만 보고 다녀야 했고, 뒤에 완전군장같이 수십 키로에 달하는 가방에 물건을 꽉꽉 넣어놓고 다녀야만 했다. 그것은 징계였다. 낮은 능력을 지닌 하찮은 존재들이니 너희는 그 대가들을 견디며 평생을 살아라! 라는 상징의 의미였다. 그것은 더욱이 우리와 저들의 갭 차이를 표면적으로 나타내주는 좋은 낙인이었고, 그들의 권위 아래 나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운명을 얼떨결에 ‘후천적’으로 부여받았다.
얼마 전, 약수동엔 이 일대를 뒤집어 놓은 나름의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바로 아키비스트라는 작자들이 한두 명씩 등장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어떤 무언의 반항적인 사건들이 자잘하게 증가한 것인데, 아주 최근에 아키비스트를 신봉하는 한 작자가 장충고등학교의 담벼락을 그야말로 ‘월담’ 해버리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장충고등학교는 내가 졸업했던 고등학교로 우리네 계층, 즉 약수 사거리 일대 가장 낮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자식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우리 모교는 얌전히 책걸상에 걸터앉아 입맛에 맞게, 다스리기 좋게 짜여진 식단 같은 커리큘럼에 의해 철저하게 세뇌시키는 악명 높은 학교였다.
그런 학교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 ‘담’을 넘어버리는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학교를 조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조리 위 사건과 연관이 있는지 찾아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엔 휴교령이 내려진 뒤였다.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눈치 없이 그 길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카메라를 들고 서 있으며 욕을 처먹기에 알맞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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